![]()
교회, 해방의 변화만큼 새로운 과제 직면 일본의 침략 전쟁은 패배가 예견된 것이었다. 노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전쟁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확대시켰다. 1941년 12월 8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 태평양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유럽에서의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미얀마)까지 전선을 확대시키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곧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1944.7.7.) 후 전세는 급변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1944년 11월 사이판에 비행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오키나와(1945.6.)와 유황도(硫黃島)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일본 본토 상륙을 준비했다.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1945.7.16.) 미국은 이를 히로시마(廣島·1945.8.6.)와 나가사키(長琦·1945.8.9.)에 투하함으로 일본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 당했고, 중국 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패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지역 전쟁에서는 추축국(樞軸國)의 하나였던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자(1943.6.) 연합국의 처칠 수상, 루즈벨트 대통령,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1943.11.12.) 전쟁 후의 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고 결의,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했다. 독일이 항복하자(1945.5.7.) 연합국은 다시 독일 포츠담에 모여(1945.7.17)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한편 카이로선언의 이행을 결의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 될 것이다”라고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패전의 길로 접어든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면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하기 위해 소련을 중재로 삼고자 했다(1945.5.14.). 이보다 앞서 소련의 얄타에서 모인 회담에서(1945.2.11.) 스탈린, 처칠, 루즈벨트는 대 일본, 대 독일 전략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소련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참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북조선으로 진출했다. 1945년 5월 베를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는 자살하고 8월 나치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원자폭탄의 투하로 일순간에 히로시마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항복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1945.8.10.) 항복을 결정,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직접 항복 방송을 했다. 항복 방송은 두 시간 후 재방송 되었다. 전쟁은 끝났고 9월 2일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정부 대표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그 밖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이 결정되자 조선 총독부는 패전 후에 있을지도 모를 보복을 막고자 정무총감(遠藤柳作)을 여운형 송진우 등에게 보내 막후 접촉을 시도했다. 해방 당시 한국에 거류하던 일본인은 민간인과 군인을 합쳐 80만 명에 달했다(송건호는 71만2천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항복이 정식 발표되자 조선총독부는 약 10일간에 걸쳐 총독정치의 죄악사와 관련된 총독부 문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의 공공기관, 헌병대, 경찰서, 검찰, 법원, 주재소, 도, 부(府), 군 등 3천여 각급기관의 기밀문서를 불태웠다. 조선통치에 관한 죄악 문서는 조선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각했다. 조선에 있던 일부 문서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조선의 광업자원에 관한 문서 등을 가져간 것은 후일의 조선 진출을 위한 의도였다. 해방 당시 조선에는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과 부여신궁 등 1141개의 신사(神社)가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불태웠다. 이른바 승신식(昇神式)이었다. 한국인들에 의해 모욕적으로 태워지기보다는 영예로운 자결을 택한 것이다. 전국의 136개 신사는 조선인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평양신사는 8월 15일 밤에 불살라졌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부산의 용두산 신사는 11월 17일 불살라졌다.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마지막까지 투옥되어 있던 20여명은 평양 대구 부산 광주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해방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우리나라와 교회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
출처 : 도란도란 옹달샘
글쓴이 : 옹달샘 원글보기
메모 :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2) 북한에서의 교회쇄신운동 (0) | 2013.08.14 |
---|---|
[스크랩]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1)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출옥 (0) | 2013.08.14 |
[스크랩]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9) 일제 하에서의 신학교육 (0) | 2013.08.14 |
[스크랩]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8)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변질 (0) | 2013.08.14 |
[스크랩]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7) 주기철 목사의 참배 거부와 순교 (0) | 2012.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