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스크랩]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 ①

마음상자 2013. 7. 26. 12:31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

2012.09.06 18:47


성서 속 사람들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운다

성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처음 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언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역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번역 과정을 거치면서 성서의 배경이 이스라엘, 중동지역 그리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각자 번역하고 있는 언어의 국가와 실정에 맞는 표현을 사용한다. 결국 성서에서 사용된 언어의 독특한 의미라든가 이 지역만이 갖는 역사적, 지리적, 사회문화적 상황들이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최근 이러한 오류를 좁히기 위해 언어, 역사, 지리, 고고학 같은 다양한 학문들을 통해 성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주변국가에 남겨진 고고학적 흔적을 밟으면서 성서 속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는 것처럼 당연히 국가도 주변국과 더불어 존재한다. 성서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그리고 왕국시대 전반에 걸쳐 가나안 사람들과 수없이 많은 관계를 형성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했고, 정치적, 혈연적 연맹을 맺기도 했으며 또한 경제적 교류를 했다.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을 살펴보기 전 가나안 땅에 살았던 사람들 즉 블레셋, 두로와 시돈, 모압, 에돔, 암몬, 아람 사람들의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흔적들을 중심으로 만나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을 찾는 순례객들은 성서와 관련하여 많은 질문들을 쏟아낸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의 팔레스타인(Palestine)이 구약성서에 등장한 블레셋(Philistines)과 동일한가”이다. 만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민족적 동질성을 묻는 것이라면 당연히 “아니다”이다. 그러나 ‘땅’에 관한 질문이라면 부분적으로 “맞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고고학과 성서학적인 증거들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사라졌는지 좀더 분명히 살펴보려고 한다.

“갑돌에서 온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 중 이스라엘과 가장 많은 접전을 벌였던 것은 블레셋 사람들 혹은 바다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다섯 도시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여호수아 13:3)으로 이스라엘의 남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이들이 살았던 땅을 히브리어 성서는 ‘Peleshet(펠레쉐트)’라 불렀고 우리말 성서는 ‘블레셋 사람들’ 혹은 ‘블레셋’으로 번역했다. 앗수르 문헌에서는 이 땅을 ‘Palashtu(팔라쉬투)’ 혹은 ‘Pilistu(필리스투)’라 불렀다.

창세기 10장 14절은 블레셋 사람들을 이집트와 관련 있었던 가슬루힘에서 왔다고 기록하지만 여러 성경 구절에서는 오히려 이들을 갑돌 혹은 갑돌 섬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아모스 9:7; 예레미야 47:4; 신명기 2:23). 갑돌은 크레타의 히브리어 이름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갑돌 기원설을 지지하고 있다.

특별히 학자들은 호머의 서사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주전 14∼12세기경 에게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기후적 혼란으로 인해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었음을 증명했고 그중에는 크레타 섬이 고향인 이들도 있었다. 크레타 섬에서는 에게 문명을 주도했던 미노아 문명이 발전했었다. 주전 1400년경 그리스 본토의 침입으로 크레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주전 1300년경 키프루스 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이 섬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다른 바다 사람들과 함께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를 공격했다. 람세스 3세의 카르낙 신전 벽화에는 테커, 데니엔, 세르덴, 베쉐시, 그리고 블레셋이라 불리는 바다 사람들과의 전쟁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람세스 3세는 그들을 나일강에서 몰아냈다고 한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주전 1200년 전후 현재 이스라엘의 해안에 정착했다. 초기 그들의 토기, 종교적 형상들, 매장관습, 건물구조, 식습관 등에서 여전히 그들의 고향 냄새가 났다. 하지만 100년의 시간이 채 흐르기도 전 그들은 가나안화되어 갔다.

최근 가드(텔 에-사피 Tell es-Safi)에서의 발굴은 이러한 블레셋 사람들의 기원과 정착 그리고 문화 변화를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드는 현재 바르-일란 대학교 고고학과의 메이르 (A Maeir) 교수님의 지도 아래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활발하게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유적지다. 골리앗의 고향으로 유명한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D구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주전 9세기경의 파괴 흔적이 열왕기하 12장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람왕 하사엘의 침입으로 여겨져 더욱 관심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필자(임미영 박사)가 인솔한 한국 고고학 발굴팀은 D구역을 서쪽지역으로 확장하여 하부 도시의 크기를 가늠하는 일을 맡았다. 겨우내 내린 비로 엉망이 되어버린 발굴 현장의 코너를 정리하다 지표면 10㎝ 아래에 각을 잘 다듬은 90도로 각진 돌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코너를 다듬어 갈수록 돌의 형태는 드러났으며 이 각진 돌은 제단의 뿔이었다. 발굴로 드러난 것은 두 개의 뿔이 달린 100㎝ 높이의 제단이었다. 세계적인 잡지 ‘Biblical Archaeology Review’는 이 제단을 ‘2011, 올해의 유물’로 선정하기도 했으며(Maeir 2012) 유명 방송국들은 앞 다투어 취재를 했다.

가드의 제단은 이스라엘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4개의 뿔이 아닌 두 개의 뿔만이 있었다. 이렇듯 두 개의 뿔을 신성화하여 제단을 사용했던 흔적을 표현한 유물들(인장, 목관, 점토 형상 등)이 발견되는 곳은 크레타 섬이다. 크레타 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미노아 왕국의 미노타우루스와 라비린토스에 관한 신화는 황소와 관련된 유명한 신화로 1901년 미노아를 처음 발굴한 에반스는 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뿔들이 표현된 유물들을 황소 뿔의 신성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크레타 즉 갑돌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함께 종교적 관습도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쪽 해안에 정착한 이후 3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미노아의 전통인 두 개의 뿔만을 조각한 제단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향 문명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제단의 전체적인 모습에 있어서 돌 하나를 깎고 돋음 장식을 조각한 므깃도의 제단과 유사해 아마도 그들의 물질문화가 가나안 혹은 이스라엘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점차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았음이 성서적,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제단이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블레셋의 다곤신 같은 그들의 종교를 정의하는데 정확한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또한 제단의 꼭대기에 어떤 그을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 제사를 위한 용도였는지 아니면 성서 속의 입상이었는지의 해답 역시 알 길이 없다. 이러한 해답을 찾기 위해 2012년 여름에도 가드에서는 제단 주변 지역들이 발굴된 바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되는 발굴의 결과에 귀 기울여야 하겠다.

<‘블레셋 사람들’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학사 △예루살렘대학교 고대 근동 역사학 석사 △히브리대학교 고고학 석사 △이스라엘 바르일란대학교 고고학 박사 △현 텔 에-사피 발굴 지도자 △국제성서박물관 학예연구관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김진산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학사 △서강대학교 종교학석사 △이스라엘 바르일란대학교 구약학박사 △예루살렘 한인교회 담임목사 역임 △현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출처 : 예.아 -YEAH- 그 환한 빛
글쓴이 : yeahj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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